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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조정의 다수는 척화론, 즉 청과의 전쟁도 불사하자는 강경론을 지지했기에 최명길은 외롭게 현실을 호소해야 했어요.병자호란 직전, 청의 사신이 요구한 인질 문제와 조공 문제를 놓고 조정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뉘었고, 최명길은 주화파의 중심 인물로서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전쟁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 했어요. 그는 무력 충돌 시 조선이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을 치르게 될 것을 예견 했고 실질적인 국익을 위해서라도 강화가 필요하다고 강조 했어요. 반면 그의 정적이자 대표적인 척화론자인 김상헌은 청을 오랑캐로 여기며 굴복을 반대했고, 이는 조정 내 갈등으로 비화 되었어요. 최명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청은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 했어요. 인조는 남한산성에 피신했고, 전쟁은 조선에게 참혹한 패배로 끝났으며, 삼전도의 굴욕적인 항복이 이루어졌어요.전쟁이 끝난 후 최명길은 다시 조정을 설득하여 청과의 외교 관계를 정비 하는데 힘 썼어요. 그는 청과의 사대관계를 정립하며 조선의 체면을 유지하면서도 실리를 챙기는 방향으로 외교를 추진 했어요. 그의 실리적 외교관은 조선 후기의 외교 정책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으며, 국가가 생존을 위해 때로는 현실을 직시하고 융통성 있는 외교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 받아요.